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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은 웬일로 감기한번 안걸리고 지나가나 했더니, 겨울 다 지나서 때늦은 감기 몸살이 왔다. 할일도 많은데 콧물 훌쩍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역시 대박 추울때보다 추울락말락 할때 감기가 더 잘 걸리나보다.


감기걸리니까 갑자기 군대 있을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해안경계 부대였는데 진짜 겨울에 바다가 얼 정도로 추웠다. 목토시 귀도리에 깔깔이까지 완전무장해도 칼바람이 막아지지 않는다. 다른부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바지깔깔이까지 입고 다녔다. 안그러면 정말 피가 얼어붙어서 걷지도 못했으니까.



암튼 아무리 군인이라도 그런데서 근무하면 겨울에 감기한번 안 걸릴 수 없는데, 내가 병장일 때 한번은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감기가 온 날이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손가락 관절 한마디만 까딱 움직여도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야간 근무 나갈 시간인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지통실 전화로 중대장한테 전화했다. 너무 아파서 못나가겠다고. 그러니까 중대장이 뭐 이런 놈이 다있냐고 하더라. 아무리 아파도 그런건 직접 와서 보고해야지 전화로 찍찍거리냐고. 니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고.



와 나 그때 진짜 억울해서 눈물나는 줄 알았다.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몸상태가 당장이라도 119불러야 될정도로 위독한 상황인데. 전화 수화기도 겨우 들고 보고한 건데 그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니. 나중엔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나더라.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긴데 근무 중에 거품물고 실신하리라는 생각에 오기로 일어나서 근무 나갔다. 내가 잘못돼면 그때가서 후회하겠지, 이렇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으로ㅋㅋ..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나도 참 어렸다.



아무튼 우리는 해안경계만을 24시간 순찰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주간 10시간 야간 14시간 항시 해안을 비우지 않고 로테이션 되는 근무체계였다. 그 몸상태로 14시간 순찰돌면 반드시 뭔 사단이 나도 나지 싶었다.


일부러 순찰도 빡세게 돌고 중간에 중대장 만나면 경례도 보란듯이 목에 피가 터지도록 질러 줬다. 목이 갈라져서 쇳소리가 나왔다. 나의 악바친 모습을 보고 중대장도 썩소를 짓더라.


그렇게 나의 복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몇 시간을 순찰을 돌고 있으니 뭐가 이상했다. 거품 물고 실신하기는 커녕 감기가 점점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만 움직여도 관절 마디마디가 녹슨 경첩 삐걱대는 마냥 비명을 질러댔는데, 점점 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어,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되는데... 쓰러지고싶어도 쓰러지지 못하는 나의 건강함이 원망스러웠다. 당시에는 나도 군인 체질이 되어있었나보다. 몸을 굴릴수록 병이 낫고 있으니..


그렇게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그때도 좀 웃기긴 했다.. 야간 14시간 근무라도 14시간 내내 순찰만 도는 것은 아니고 중간에 30분 정도 교대로 한명씩 초소 상황병 근무도 했는데, 내 초소근무 차례가 오니까 긴장이 탁 풀리더라.


초소에 앉자마자 얼마 안지나 곧바로 졸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가끔 졸기는 하는데 그날은 너무 긴장이 풀어졌는지 좀 많이 깊게 졸았나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등 뒤에서 문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나를 불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연대장이 서있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 조는걸 연대장한테 딱 걸려버렸으니. 우리 부대는 아주 가끔씩 연대장이 불시 순찰을 돌곤 하는데 우리 순찰병들이 연대장 차를 발견하면 미리 무전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상황병이 졸다가 걸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근데 그날은 그 무전소리조차 못들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버린 거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제 나는 영창인가? 그때 연대장이 상황보고라든가 물때라든가 몇가지를 물어봤는데, 내 기억에 좀 횡설수설한 것 같다. 그때 심정은 거의 자포자기였다. 연대장이 마지막으로 가면서 중대장은 뭐하냐고 물어봤는데,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 나도 모르게 "중대장님 주무시고 계실겁니다."라고 말해버렸다ㅋㅋ..



"중대장이 지금 잔다고? 음..." 연대장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초소를 나갔다. 잠시후에 내가 지금 뭔짓을 했는가 싶더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지통실 상황병한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알려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근무교대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 앞에 한마리 파리목숨같은 기분이었다. 거꾸로 매달아놔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여차저차 근무교대 시간은 돌아왔다.



그리고 교대점호를 하는데 이상하게 중대장이 별 말이 없다. 점호가 끝나서도 따로 부르지도 않았다. 나중에 지통실 상황병 동기가 나보고 왜 그랬냐고 핀잔을 준 것을 보면 암튼 겁나게 깨진건 맞는 것 같다. 그 후에도 나한테는 별일이 없었다. 다행히 영창도 안갔다. 연대장이 보기에 내가 불쌍해 보였나 보다.


나의 말실수가 뜻밖의 복수(?)가 돼버리긴 했지만, 왠지 통쾌하기보단 찝찝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미안하더라. 그나마 중대장도 눈에 보이는 징계는 안받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그 후에 이상하게 중대장이 나한테 별 터치가 없었다. 순찰시간에 장난치다 걸려도, 교대시간에 좀 늦어도, 별로 혼내지 않더라. 그렇게 나는 병장 말년에 뜻하지않게 관심사병아닌 관심사병이 돼버렸다.